본문내용 금융위원회가 기업 부담과 대응 능력 미흡 등을 이유로 기후공시 의무화 대상을 극히 제한하는 ‘ESG 의무공시 로드맵 초안’을 지난달 25일 발표한 가운데, 국내 기업들의 실질적인 기후공시 대응 역량은 정부의 평가를 크게 상회한다는 수치가 제시됐다.
금융위는 국내 기업의 최초 ESG 의무공시(기후공시)를 ‘2028년(FY27년) ‘자산 3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로 설정하고, 스코프3(Scope 3) 공시도 이로부터 3년 유예한 2031년부터 시행하겠다는 내용으로 매우 보수적인 공시 로드맵 초안을 발표한 바 있다.
실제로 금융위가 제시한 자산 규모 30조원 코스피 상장사는 58개사에 불과하다. 이는 제조업, 수출기반 중심이라는 국내 산업의 특수성과 기후대응 능력 미흡 등을 이유로 내세우는 산업계의 주장을 전폭적으 로 반영한 방안이다.
하지만 CDP한국위원회는 9일 발간한 ‘2025 CDP 한국 보고서’를 통해 법적 의무가 없는 상태에서도 기후정보를 자발적으로 공개한 국내 기업이 700여 개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는 금융위 로드맵상 최초 의무화 대상인 58개사를 훨씬 넘어서는 수치다.
특히 산정이 까다롭다고 평가되는 가치사슬 전반의 배출량(스코프3)을 보고한 기업은 2023년 127개에서 2025년 222개(분석 대상의 76%)로 2년 만에 급증했다.
이들 기업은 스코프3의 전체 15개 배출 항목 중 절반 이상인 평균 8개 항목에 대해 이미 산정 및 보고를 완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다연 ESG경영실장은 “기술적 한계와 인프라를 이유로 스코프3 공시를 2031년으로 3년 유예한 금융위의 판단과는 달리, 국내 주요 기업들은 가치사슬 전반의 배출원 절반 이상을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이미 운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금융위의 ‘ESG 의무공시 로드맵 초안’이 국내 기업의 기후공시 역량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는 4월 확정될 최종 로드맵에는 기업의 실질적인 역량을 반영해 최초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공시 기준 또한 글로벌 요구 수준에 부합하도록 재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전망이다.
CDP는 기후변화, 물, 산림자원, 생물다양성, 플라스틱 등 환경 이슈와 관련해 전 세계 주요 기업에 정보 공개를 요청하고, 이를 금융활동에 반영하는 전 세계 금융기관 주도의 국제 이니셔티브다.
특히 우리나라가 수용한 지속가능성 공시의 국제표준 중 하나인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의 기후공시 기준(S2)은 CDP의 체계를 기반으로 제정되었으며, 요구하는 정보의 기준 또한 유사하다. 따라서 CDP를 통한 정보공개는 곧 글로벌 기후 공시 의무화에 대응으로 평가받는다.
CDP한국위원회 장지인 위원장은 “CDP는 우리나라에서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우리 기업들은 투자자 및 고객사의 요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기후공시 역량을 지속적으로 축적해 왔다”며 “금융위의 ESG 의무공시 로드맵은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여, 기후공시가 기후금융으로 연계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재설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CDP 글로벌 쉐리 마데라(Sherry Madera) 대표는 “환경 정보 공개는 이제 비즈니스의 핵심 데이터 그 자체”라며 “오늘의 정보 공개 결정이 내일의 경쟁 우위를 결정짓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2025 CDP 한국 보고서. CDP한국위원회 제공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온실가스 배출량 데이터에 대한 신뢰성과 직결되는 제3자 검증률도 91%로, 글로벌 평균인 67%를 크게 상회했다. 다만, 기후변화 대응 성과는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분석대상 기업 총 배출량의 90%를 차지하는 스코프3 영역에서 감축목표를 수립한 기업은 15%에 불과했고, 이행 달성률 또한 단기 -15%, 장기 -6%로 오히려 배출량이 증가하는 ‘역주행’ 상태로 조사되었다.
축적된 기후공시 경험을 실질적인 감축 이행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스코프3 배출량 공시의 빠른 의무화 등 정책적 보완이 과제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에너지 전환의 구조적 장벽은 여전했다. 분석대상 기업의 전체 에너지 소비 중 재생에너지 비중은 3.07%에 그쳤으며, 기업이 직접 생산해 쓰는 자가발전 비중은 단 0.20%로 매우 미미했다. 특히 한국 RE100 회원사의 경우 국내 사업장 이행률(9.7%)이 해외 사업장(16.8%) 대비 낮아 국내 조달 환경의 제약이 뚜렷하게 나타났다.